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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착하게 사는 것'과 '건강하게 소통하는 것'이 같은 말인 줄 알았습니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기분이 상해도 웃으며 넘기고, 집에 돌아와서야 혼자 끙끙 앓는 패턴을 반복하면서도 그게 배려심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영국 국립 심리치료 기관에서 15년간 일한 전문가의 설명을 접하고 나서야, 제가 착한 게 아니라 그냥 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소통이 어려운 건 성격 탓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저는 원래 소심한 편이라서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할 말을 못 하는 이유가 타고난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책임을 성격에 넘기는 거죠.
그런데 영국의 국립 심리치료 기관인 IAPT(Improving Access to Psychological Therapies)에서 실제로 환자들을 만나온 전문가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여기서 IAPT란, 누구나 우울증·불안장애·대인공포증 같은 증상을 겪을 때 무료로 찾아갈 수 있는 국민 심리 상담 치료 센터를 의미합니다. 영국 전역에 구마다 한두 곳씩 운영되는 공공 기관입니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온 결론은 단순했습니다. 소통은 성격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것. 기술이라면 배울 수 있고, 연습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작은 것부터 연습해 보니, 이게 정말이었습니다.
- 건강한 소통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기본기가 부족한 경우
- 방법을 알아도 막상 상황이 오면 걱정과 두려움에 입이 굳어버리는 경우
- 한두 번 시도해봤지만 꾸준히 연습하지 않아 습관으로 굳지 못한 경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연습 부족의 문제입니다.
내 소통 유형, 어디에 해당됩니까
자신의 소통 방식을 파악하는 게 먼저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보면 생각보다 빨리 자신의 패턴이 보입니다.
첫 번째는 수동적 연두부형입니다. 상대가 선을 넘어도 허용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공격하는 유형입니다. 상황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왜 또 그냥 있었을까" 하며 자책하는 게 이 유형의 특징입니다. 제가 꽤 오래 이 패턴을 반복했습니다. 습관성 사과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제가 잘 몰라서요", "바보 같은 생각인데요"처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방어막을 치는 것이죠.
두 번째는 공격적 불도저형으로, 상대의 말에 즉각 맞받아치며 비난이 오가는 유형입니다. 감정이 터지면 필요 이상으로 거세게 반응하고, 나중에 관계가 어색해지는 경험을 반복합니다. 저도 참다가 한꺼번에 폭발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상대와의 관계가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수동 공격적(passive-aggressive) 유형인 돌려가기형입니다. 여기서 수동 공격적이란,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공격 의도를 담아 행동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가시 돋친 칭찬이나 "우리 친한 사이잖아"를 앞세운 통제가 대표적입니다. 가스라이팅의 초기 형태로 볼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가 바로 단호박형입니다. 부드럽고 배려 있지만, 아닌 건 분명히 짚어주는 유형입니다.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요구를 차분하게 전달합니다. 목표는 바로 여기입니다.
단호박형이 되려면 이렇게 연습하십시오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즉각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분이 상하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맞받아치거나 반대로 꾹 참고 넘기는 게 아니라 1~3초 간격을 두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대화가 됩니다. 이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 해보려 했을 때, "무슨 뜻이야?"라는 짧은 한 마디조차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습니다.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에서는 이런 즉각 반응을 바꾸는 데 집중합니다. CBT란, 부정적 상황에서 자동으로 떠오르는 왜곡된 생각과 그에 따른 행동 패턴을 인식하고 수정하는 심리 치료법입니다. 핵심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사고·행동의 고리를 끊는 것입니다. 바로 반응하지 않고 시간을 버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요구를 두 가지로 나눠서 말하는 것이 CBT의 실용적 적용 방식입니다.
감정은 "나 지금 좀 혼란스러워"처럼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요구는 "네가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어" 또는 "이건 하기 어려울 것 같아"로 표현합니다. 화가 난다고 말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동입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권리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비난하는 것은 공격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연습이 단호박형의 핵심입니다.
처음 이 방식을 써봤을 때를 기억합니다. 부탁을 받았을 때 "잠깐 생각해 볼게"라고 했더니 상대가 별 반응 없이 "그래, 알겠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 한 번의 경험이 생각보다 훨씬 큰 자신감을 줬습니다.
자존감은 쌓아가는 것입니다,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영국 성인의 약 46%가 "내 자존감이 낮다"고 응답한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Mental Health Foundation UK). 이건 영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SNS에서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보게 되는 환경, 그리고 조금만 뒤처진다 싶으면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준의 경직성은 지금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자존감이라는 게 어느 날 책 한 권 읽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저는 몸소 경험했습니다. 작은 시도를 하고, 예상보다 나쁘지 않은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 조금씩 단단해지는 겁니다. 마치 적금처럼, 매달 소액을 넣는 느낌입니다.
자기 자비(Self-compass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기 자비란, 실수하거나 부족함을 느낄 때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고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텍사스대학교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자기 자비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불안과 우울이 낮고 회복탄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self-compassion.org). 자신을 채찍질해야 성장한다고 믿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소통 연습 이후 제가 가장 크게 달라진 것도 이 부분이었습니다. 내 감정을 표현했더니 관계가 깨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쌓이면서, 더 이상 매번 집에 돌아와서 후회하는 일이 줄었습니다. 무게 중심을 상대의 반응에 두지 않고 내 쪽으로 가져오는 것, 그게 자존감이 탄탄해진다는 의미라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소통 유형 진단은 어떻게 하나요?
A. 특정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기분이 상해도 웃으며 넘겼다면 수동형, 즉각 맞받아쳤다면 공격형,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며 돌려 말했다면 수동공격형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단, 사람은 상황에 따라 유형이 달라지기도 하므로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해서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Q. 단호박형 소통, 연습하다가 관계가 나빠지면 어쩌나요?
A. 처음에는 그 걱정이 제일 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차분하게 감정과 요구를 표현했을 때 관계가 멀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무조건 맞추다가 한번에 폭발했을 때 관계가 더 어색해지는 경험이 많았습니다.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내 감정을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Q. 인지행동치료(CBT)는 어디서 받을 수 있나요?
A. 국내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나 심리 상담 센터에서 CBT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도 무료 또는 저비용으로 연결해주는 경우가 있으니 먼저 가까운 센터에 문의해 보시길 권합니다. 치료 전 자가 실천으로는, 자동으로 떠오르는 부정적 생각을 인식하고 '정말 그럴까?'라고 한 번 더 물어보는 습관부터 시작해 볼 수 있습니다.
Q. 자존감을 높이는 가장 빠른 방법이 있나요?
A. 빠른 방법보다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작은 시도를 하고 그 결과를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도전이 아니어도 됩니다.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상황에서 "이번엔 어려울 것 같아"라고 한 마디 하는 것, 그리고 상대가 생각보다 괜찮게 반응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 이 경험치가 쌓일 때 자존감도 같이 단단해집니다.
결론
저는 지금도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게 말하진 못합니다. 여전히 어떤 날은 집에 돌아와서 "그냥 넘겼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게 저의 고정된 성격이라고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연습할 수 있는 기술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통 유형을 먼저 파악하고, 작은 상황부터 감정과 요구를 차분하게 말해보시길 권합니다. 처음 한두 번은 어색하고 무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색함을 한번 통과하고 나면, 관계가 생각만큼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바로 자존감이라는 적금 통장에 한 회차 납입되는 순간입니다.

